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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모 최종화 (왕관, 자기서사, 성장)

by thevivera 2026. 6. 10.

 

왕좌에 오르는 것이 진짜 성공일까요? 드라마 <연모> 20화 최종화를 보고 나서 이 질문이 며칠째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났는데, 정확히는 주인공이 왕관을 쓰는 순간이 아니라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이었습니다.

왕관을 벗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휘가 곤룡포를 벗고 소박한 여인의 옷을 입는 마지막 장면은, 어떤 면에서 보면 퇴장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왕좌라는 절대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건 패배가 아니라 자기서사(自己敍事), 즉 자신이 스스로 자기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힘을 되찾은 순간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이휘는 20화 내내 왕으로서의 정체성과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여기서 정체성 갈등이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 정체감(Ego Identity) 위기로, 개인이 사회적 역할과 내면의 진짜 자아 사이에서 일치점을 찾지 못할 때 발생하는 심리 상태입니다. 이 개념을 처음 정립한 발달심리학자 에릭슨(Erik Erikson)은 정체성의 확립이야말로 인간이 진정한 삶의 방향을 찾는 데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많은 분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세상이 기대하는 나"와 "내가 원하는 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경험이 있을 테니까요. 20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도 비슷한 질문 앞에 멈춰 선 적이 있었습니다. 이휘의 마지막 미소가 그래서 더 깊게 박혔습니다.

이 장면이 특히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휘의 선택이 충동적이지 않고, 20화에 걸친 서사의 필연적 귀결로 그려집니다.
  • 왕좌를 포기한 대가로 얻은 것이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정지운 곁에서의 웃음, 억압 없는 표정이 그것입니다.
  • 시청자에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조용히 남깁니다.

성장서사가 설득력을 얻는 조건

<연모>를 두고 단순한 로맨스 사극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의 본질은 오히려 성장서사(成長敍事)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장서사란 주인공이 외부 환경의 충격과 내면의 변화를 통해 전혀 다른 인물로 탈바꿈하는 구조적 이야기 방식입니다. 단순히 나이를 먹거나 사건이 쌓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변화에 대한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이휘는 한기재와의 마지막 대립에서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직접 증명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드라마의 서사 구조가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제대로 작동시켰다고 느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극적 긴장이 절정에 달한 후 감정이 해방되며 정화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마지막 화에서 쌓인 모든 긴장이 한꺼번에 터지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던 것이 바로 이 효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장서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주인공의 변화가 외부 사건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결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연모>는 상당히 잘 완성된 편입니다. 이휘가 마지막에 내리는 선택은 누군가에게 강요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점에서 단순히 감동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봅니다.

한국 드라마의 성장서사 구조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시청자 감정 이입 지수가 가장 높은 장면은 주인공이 자발적 포기를 선택하는 장면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출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 결과가 <연모> 최종화에서 이휘의 선택이 왜 그토록 강렬하게 남는지를 설명해 주는 듯합니다.

드라마적 완성도와 남은 여운

<연모>가 이토록 오래 기억에 남는 데는 서사 외에도 드라마 자체의 미장센(Mise-en-scène)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미장센이란 장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의상, 조명, 배경, 배우의 위치 등이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연모>는 이 부분에서 특히 탁월했습니다.

최종화에서 이휘가 처음으로 여인의 옷을 입는 장면에 사용된 색채 대비는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왕복의 짙고 무거운 색감과 달리, 마지막 장면의 색채는 가볍고 투명합니다. 저는 이 연출 의도를 처음 인식했을 때 "아, 이 드라마는 그냥 잘 만든 게 아니라 정말 깊이 생각하고 만들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보기 좋은 화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사의 감정 변화를 시각적으로 번역한 결과물이었습니다.

OST 역시 같은 맥락에서 동작합니다. 극적 긴장이 높아질수록 음악은 오히려 최소화되고, 가장 감정적인 장면에서는 침묵이 의도적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선택은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의 공식과 반대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드라마는 왜 이렇게 마음에 남냐"라고 하시는데, 저는 이 연출 방식이 그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연기에 대해서는 과하게 칭찬하지 않아도 됩니다. 최종화에서 한기재 역의 배우가 보여준 설득력 있는 악인 묘사, 그리고 이휘 역이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절제된 미소는 대사 없이도 감정을 완전히 전달했습니다. 저는 그 표정 하나가 20화 전체의 문장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고 느꼈습니다.

<연모>는 끝났지만 이 작품이 남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왕관처럼 무거운 기대를 쓰고 사는 것이 성공인지, 아니면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용기인지. 저는 개인적으로 두 입장 모두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휘의 마지막 웃음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그 선택이 체념이 아니라 완전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남들이 씌워준 역할 속에서 지쳐있는 분이 계신다면, 이 드라마를 한 번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왕관보다 무거운 것이 정말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이 얼마나 가벼울 수 있는지를 이휘가 직접 보여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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