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원작 소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아셨나요? 저도 이번에 다시 보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다이애나 윈 존스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라는 것을, 20년 가까이 그냥 지나쳤던 거죠. 그래서 이번 글은 단순한 감상 후기가 아니라, 원작과 영화의 차이부터 스팀펑크 미학, 그리고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이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까지 꼼꼼하게 뜯어봤습니다.
원작 소설과 영화, 뭐가 얼마나 다를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이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리지널 세계관이구나"라고 철석같이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영국 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Diana Wynne Jones)가 1986년에 발표한 판타지 소설이 원작이었습니다. 미야자키 자신이 밝힌 영화화 이유가 재밌는데, "성이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어린 소녀가 갑자기 90세 노인이 된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설정의 기이함에 꽂힌 거죠.
원작 소설은 전형적인 판타지 로맨스에 가깝습니다. 경쾌하고 유머가 넘치며, 하울은 대놓고 바람둥이로 그려집니다. 반면 미야자키의 영화는 원작의 주요 설정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완전히 자기 언어로 재창조했습니다. 공간적 배경만 봐도 그렇습니다. 원작의 영국 배경을 영화에서는 스위스 마을 거리, 파리풍 궁전, 이탈리아 바다 등 유럽 각지를 뒤섞은 무국적 공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제작진이 직접 현지에 파견돼 자료를 수집하고 스케치했다는 사실이, 화면 곳곳에서 느껴지는 밀도감을 설명해 줍니다.
캐릭터 변형도 상당합니다. 원작의 남성 마법사 설리만이 영화에선 관록 있는 여성 마법사로 바뀌는데, 이건 미야자키 특유의 강한 중년 여성 캐릭터 선호와 맞닿아 있습니다. 황무지 마녀도 악역 일변도에서 치매 기운이 있는 귀여운 할머니로 재해석됐고요. 가장 큰 차이는 소피의 외모입니다. 원작에서 노파로 변한 소피는 고정된 모습이지만, 영화에서는 감정 상태에 따라 나이가 오르내립니다. 소피의 내면 성장을 외모의 변화로 시각화한 미야자키식 연출입니다.
- 원작: 경쾌한 판타지 로맨스, 하울은 바람둥이, 공간 배경은 영국
- 영화: 내면 성장에 초점, 하울은 소피만 사랑, 유럽 각지를 혼합한 무국적 공간
- 소피의 외모: 원작에서는 고정, 영화에서는 감정에 따라 나이가 변함
- 설리만: 원작 남성 → 영화 여성 마법사로 변경

스팀펑크라는 렌즈로 보면 달라 보이는 것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하울의 성이 왜 저렇게 생겼을까 싶었습니다. 새 다리에 굴뚝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고철 덩어리를 짜깁기한 것 같은 외관. 나중에야 이게 스팀펑크(Steampunk) 미학을 의도적으로 반영한 설계라는 걸 알았습니다. 스팀펑크란 19세기 증기기관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SF 장르입니다. 쉽게 말해 기술은 발전했지만 그 동력이 전기가 아닌 증기에 머물러 있는,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세계관입니다.
이 장르가 일본에서 특히 인기를 끄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를 경험한 메이지 시대에 대한 집단적 향수가 스팀펑크 미학과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의 작품들을 보면 이 증기기관 이미지가 거의 빠지지 않습니다. 하울의 성 굴뚝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 오프닝에서 연기를 뚫고 등장하는 성의 이미지가 바로 그겁니다. 단순한 배경 장식이 아니라 장르적 선언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부분이 있습니다. 성의 외관이 기계와 새 다리의 결합이라는 점입니다. 미야자키는 이전 작품에서도 비행기와 새, 비행기와 배를 혼합하는 방식을 써왔습니다. 이종 결합(異種結合)이 그가 즐겨 쓰는 표현 방식인 셈입니다. 새의 다리는 하울 자신을 상징합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울의 본성을 성 자체에 새긴 것이죠. 동시에 극이 진행될수록 성의 실질적 주인이 소피로 바뀌면서, 이 성은 소피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공간으로도 기능합니다.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는 성의 숙명처럼, 두 주인공도 과거에 묶이지 않고 변화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소피의 성장은 왜 조용하면서도 강렬한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은 소피가 빗속에서 혼자 우는 장면입니다. 하울이 "아름답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야"라며 좌절하자, 소피는 "나는 한 번도 예뻤던 적이 없었어!"라고 소리치고 성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 장면.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감정적인 장면이구나 싶었는데, 다시 보니 그 안에 소피의 오랜 자괴감이 압축돼 있었습니다.
소피의 성장 서사는 나우시카나 산처럼 거국적 비장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조용하고 내밀합니다. 장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청소부를 자청하고, 밥을 짓고, 마르클을 챙기고, 황무지 마녀를 돌봅니다. 이 자발적 참여가 소피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바탕이 됩니다. 미야자키는 이걸 "모성의 획득"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강요받은 모성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모성이라는 점에서, 소피의 성장은 이전 미야자키 히로인들과 결이 다릅니다.
또 주목할 부분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표현입니다. 겉으로는 90세 노파의 몸이지만 내면의 목소리에 점점 더 솔직하게 반응하는 소피. "사랑한다"고 달려가고, "나이 드니 영 약해진다"며 슬그머니 속내를 꺼내놓고, 거울 앞에서 "걱정 말아요 할머니, 당신은 건강해 보이니까요"라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자기 위로의 대사들이 이 영화를 볼수록 더 깊이 와닿더라고요.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웃겼는데, 지금은 그 대사들이 꽤 가슴을 건드립니다.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됐을 때 많은 평론가들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내면 묘사의 섬세함이었습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스펙터클보다 한 소녀의 정서적 성숙을 잔잔하게 쌓아 올리는 방식이 오히려 더 인상적이었던 거죠.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영상보다 먼저 만들어진다는 것
지브리 음악을 틀어두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경험, 저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저는 지금도 집중이 안 되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 지브리 OST를 틀어놓고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음악들이 왜 그렇게 마음을 건드리는지 궁금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히사이시 조(久石讓)는 미니멀리즘(Minimalism) 기법을 기반으로 합니다. 미니멀리즘이란 불필요한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고 핵심적인 음악 요소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작곡 방식입니다. 그는 여기에 팝, 재즈, 클래식을 융합해 고유한 색채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서양 고전음악의 구조 위에 민족적 정서를 얹는 방식이 그의 특기인데, 이것이 보편적이면서도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작업 방식입니다. 미야자키와 히사이시는 영상보다 음악을 먼저 만듭니다. 영상 제작 시작 반년 전부터 두 사람이 작품의 주제를 함께 논의하고, 이미지 앨범(Image Album)을 제작합니다. 이미지 앨범이란 영화의 분위기와 감정선을 미리 음악으로 시각화한 사전 제작물입니다. 이 앨범을 토대로 메인 테마들이 완성됩니다. 영상이 음악을 따라가는 구조라고 보면 됩니다.
이 협업은 2004년 제61회 베니스영화제 기술공헌상 수상으로 외부 인정을 받았고, 2007년에는 일본 음악 저작권협회(JASRAC)에서 영화음악 금상을 수상했습니다(출처: JASRAC 일본 음악 저작권협회). 단순히 분위기 좋은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 자체와 동등한 독립적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은 겁니다. 하울의 성에 어울리는 왈츠풍 테마가 유럽풍 공간과 딱 맞아떨어지는 이유도 그 긴 사전 논의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면, 음악이 다르게 들립니다.
- 미니멀리즘 기법: 핵심 요소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작곡 방식
- 이미지 앨범 선제작: 영상보다 음악을 먼저 만드는 미야자키-히사이시 협업 방식
- 2004년 베니스영화제 기술공헌상, 2007년 JASRAC 금상 수상
- 왈츠풍 메인 테마: 유럽풍 배경 공간과의 의도적 음악적 일치

이번에 다시 보면서 제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 영화를 즐겼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원작 소설의 존재도 몰랐고, 스팀펑크라는 시각 문법도 의식하지 못했고, 음악이 영상보다 먼저 만들어진다는 사실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알고 보니 이 영화는 한 겹씩 벗겨낼수록 설계의 깊이가 다르게 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다이애나 윈 존스의 원작 소설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미야자키가 무엇을 가져오고 무엇을 버렸는지 비교하면서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지브리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번엔 음악에 집중해서 한 번 더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분명히 다르게 들릴 겁니다.
참고: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35149&cid=58544&categoryId=58544
하울의 움직이는 성
19세기 말,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고 있는 유럽의 마을 앵거리를 무대로 삼아, 마녀의 저주로 인해 90세 노인이 된 18세 소녀 소피를 통해 진정한 인생과 사랑의 의미를 전하는 애니메이션이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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